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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일상

'더 글로리' 학폭의 진짜 가해자 부모다.

by 일모소 2023. 3. 14.

'더 글로리' 를 시청한 사람들에게 가장 짜증나는 대사를 몇 가지 주고 고르라고 하면 아마 이것을 고르는 사람이 제법 있을 것이다. "핏줄이 그렇게 쉽게 끊기니?" 심지어 이 사람은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을 괴롭힌 가해자 5인방 중 하나도 아니다. 바로 문동은의 엄마인 정미희(박지아)다. 이 대사를 처음 들었던 순간 머릿속을 강렬하게 훑고 지나가는 어떤 기억이 있었다.

 

故 구하라 씨가 세상을 떠난 뒤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나는 당사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마치 고데기로 뇌를 지지듯이 고통스럽게 흘러갔다. 우리는 더 글로리를 학교폭력과 그에 대한 복수의 이야기로 아마 기억할 것이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학교폭력 이외에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많은 폭력을 다루고 그 폭력들에 대한 각각의 연대에 대해 상당히 폭넓게 다루는 작품이다. 단지 서사를 이끌어 가는 가장 큰 줄기가 학교폭력과 이를 대하는 주변의 무관심 그리고 18년 뒤 그것들을 상대하는 문동은의 복수극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더 글로리를 보고 나서 가장 크게 다가왔던 폭력은 놀랍게도 박연진(임지연)과 그 패거리가 저지른 학교폭력도, 강영천(이무생)이 저지른 살인도 아니었다. 바로 가족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가족 구성원 중 통념상 자녀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엄마' 들의 딸들에 대한 폭력과 가해였다. 또한 그것들이 현대 대한민국 가족이 작동하는 방식과 정확하게 하나씩 맞물려 있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학폭의 진짜 가해자

 

1. 엄마라는 이유의 가해자

 

 

작중 문동은의 엄마로 등장하는 정미희는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작중 최악의 빌런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박지아 배우의 신들린 연기에서 기인한 바가 크지만, 기본적으로 어딜 가든 "피할 수 없다" 라는 인식을 그의 대사로 끊임없이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심어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가족관계증명서상 부모로 등록된 자의 경우 자식에게 매우 손쉽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며, 호적등본이 가족관계증명서로 바뀌었지만 실제로 '가족'의 관계를 행정적으로 단절하기는 매우 어렵다.

 

때문에 미희의 동은에 대한 가해는 일정 부분 국가의 제도적 묵인하에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미희가 동은에게 갖가지 가해를 저지른 것은 미혼모로써 감당해야 했던 가난도 중요했지만, 결국 제도적으로 미희가 언제든 동은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구하라의 사망 이후 벌어졌던 논쟁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친모 송 모씨는 20년도 더 전에 가출하여 전혀 그를 돌보지 않았으나, 종편 방송에까지 출연하여 "낳아 준 것" 에 대한 지분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실제로도 "낳아 준 것" 에 대한 자신의 지분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작품 속 미희의 폭력은 아주 많은 부분이 이와 닮아 있다.

 

 

 

2. 자식 보다 나를 위한 가해자

 

 

박연진의 가해 대상은 문동은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본인의 딸인 하예솔에게도 엄마로써 가해를 저지른다. 겉으로만 볼 때 그는 예솔을 사랑하는 엄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는 그렇지 않다. 연진은 예솔의 색맹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으며 (이는 적극적으로 케어를 했다가 전재준과의 관계가 발각될 위험이 커질 수도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저 남편 하도영의 돈으로 인해 예솔은 치열하게 고생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반복 중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딸인 예솔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예솔은 극중에서 "학부모 참관 수업 때 아빠(하도영)과 전재준이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는 말을 연진에게 최소 두 번은 했지만, 연진은 '지난 저녁 시간' 에 한 첫 번째 이야기는 까맣게 잊고 두 번째 이야기를 뒤늦게 했다며 예솔에게 화를 내기 바쁘다. 또한 엄마인 홍영애가 동은을 강제로 전근 보내려 하자 "예솔이가 알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한다. 즉 딸에게 전시되는 모습이 걱정되는 것이다. 개중 가장 압권은 흡연을 들킬 뻔 한 후 그의 대사다. "봤어? 내 모성 본능?"

 

실제로 작중 박연진의 모든 행동이 '밖으로 보여지는 나'를 위한 것이라 해석한다면 그가 엄마로써 어떻게 딸인 예솔을 망치는지가 좀 더 분명해진다. 연진은 언제나 취해 있기 때문이다. TV 스타인 나, 훌륭한 남편을 둔 나, 그리고 자녀를 이렇게나 사랑하는 나에 항상 취해 있는 것이 연진이다. 우리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처럼 말이다.

 

몇 년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입양 후 가정폭력으로 사망한 아동 사건에서 가해자인 양부모들은 연진과 유사한 행동을 저지른다. 그들은 아이의 입양을 떠들썩하게 축하하고 이를 주변에 자랑하였으며, TV 출연까지 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전시했으나 그 안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었던 일은 가혹한 학대와 죽음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전시욕은 결국 자녀마저도 망치게 되는 것이 박연진의 서사인 것이다.

 

 

 

 

 

3. 지나친 모성의 가해자

 

 

한국 가부장제 가정의 가장 큰 특징 (실제로 현재까지도 대다수 가정의 특징이기도 하다.) 은 실제로 자녀의 관리를 부모 중 '엄마' 가 모두 담당한다는 점이다. 김선화 배우가 분한 이사라의 엄마는 전형적으로 이와 같은 모습을 나타낸다. 그는 딸이 마약을 하더라도 너무나 관대하다. 그의 딸인 이사라는 훌륭한 예술 작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약에서 깬 딸을 마치 술에 깬 사람처럼 대우해 준다.

 

그래서 이사라는 결국 훌륭한 작가가 되었는가? 아니다. 그는 결국 약에 쩔고 통제되지 않은 생활을 하던 끝에 최혜정을 흉기로 찔러 불구로 만들고 인생을 망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공통점을 훨씬 더 강력하게 비틀어서 보여주는 등장인물이 있으니, 바로 연진의 엄마인 홍영애다.

 

 

 

4. 모순 덩어리 가해자

 

 

홍영애의 존재는 더 글로리에서 가장 모순적이다. 언뜻 무속에 심취한 듯 보이지만, 무당이 그렇게 멀리하라고 한 'ㅇ' 자는 본인의 이름 석 자 모두에 들어가 있으며, 심지어 딸, 사위, 손녀의 이름에도 모두 ㅇ이 들어가 있다. 홍영애 본인 역시 남편의 외도로 인해 이혼했지만, 딸인 박연진은 대놓고 전재준과의 사이에서 혼외자를 출산한다.

 

그러나 홍영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인 연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 현남의 남편인 석재를 살해한 것을 두고 동은이 추궁해 들어오자 그는 과감하게 자기 딸인 연진을 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딸인 연진과 그냥 같은 인물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무속에 심취하여 딸인 연진에게 ㅇ자를 멀리하라고 한 것 역시 본인을 위함이었고, 석재를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살해한 것 역시 자기 자신이 협박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결국 홍영애는 자기 자신의 모순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지막에 연진을 동은에게 팔아넘김으로써 딸인 연진에게 가해를 저지르게 된다. 물론 그 전부터 딸을 본인처럼 키워 낸 것이 가장 큰 가해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진을 버릴 일도, 자기 자신을 위해 딸을 감싸는 척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므로.

 

이처럼 더 글로리에 등장하는 모든 엄마들은 철저히 딸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는 한 가지 연결고리가 빠져 있다. "왜?" 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남성이라 잘 모르지만, 어쩌면 김은숙 작가는 딸과 엄마 사이에 있다고 전설처럼 알려지는 그 미묘한 애증의 관계가 가진 일종의 폭력성을 극대화시켜서 숨겨 두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내가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이 모든 딸과 엄마의 서사에서 빠진 연결고리는 "아빠" 라는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5. 남자는 숨은 가해자

 

동은의 엄마인 미희는 미혼모이다. 연진의 엄마인 영애는 이혼을 했다. 사라의 엄마는 목사의 아내지만 아버지는 그렇게까지 딸에게 관심을 두는 장면이 나타나지 않는다. (경찰서에 변호사를 대동하고 나타난 정도) 현남의 남편인 석재는 그 중에서도 최악으로, 열 네 살 짜리 딸이 어느 술집에 취직했길래 그렇게 돈을 많이 버냐는 입이 떡 벌어지는 질문을 할 정도의 인간 쓰레기이다. 혜정과 재준, 명오의 가족은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미희의 동은에 대한 무책임을 과연 우리는 미희에게만 물을 수 있을까. 동은이 태어나게 만든 아빠는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영애의 모순에 대해 우리는 영애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사라의 엄마가 만약의 목사의 아내가 아니었더라면? 만약에 석재가 아내와 딸을 때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실제로 가정에서 엄마들이 가하는 가해의 예시들이 많은 부분 그들의 인생을 자녀에게 갈아넣는 과정에서 발생함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때문에 더 글로리에서는 엄마들이 딸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지만, 실제로 엄마들은 아들들도 적잖게 불행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엄마들의 책임에서 끝나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는 세상이 그들의 인생을 빼앗는 문제점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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